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divi filius Augustus, 기원전 63년 9월 23일 ~ 서기 14년 8월 19일)는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재위 기원전 27년 ~ 서기 14년)이다. 
또한 로마 제국의 첫 번째 황조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초대 황제이기도 하다.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Gaius Octavius Thurinus)였으나, 카이사르의 양자로 입적된 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로 불렸다. 
기원전 44년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외할머니 율리아 카이사리스의 남동생이자 자신의 외종조부뻘인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유언장에 따라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어 그 후계자가 되었다. 
기원전 43년, 옥타비아누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군사 정권인 제2차 삼두 정치를 열었다. 
삼두 정치를 행한 집정관의 한 사람으로서 옥타비아누스는 효과적으로 로마와 속주[1]를 지배하였고, 세력을 모아 히르티우스와 판사가 사후 집정관에 재선되었다. 
이후 제2차 삼두 정치도 깨지는데 다른 집정관이었던 레피두스는 유배되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한 뒤 자살하였다. 
제2차 삼두 정치의 붕괴 후 옥타비아누스는 대외적으로 로마 공화국을 부활시키고 정부에 관한 권한은 로마 원로원에게 주었으나, 사실상 권력을 독점하였다. 
유일한 통치자가 다스리지만 대외적으로는 공화국 형태인 정치 체제의 기틀을 다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껍데기만 공화국인 이 나라는 훗날 로마 제국으로 불린다. 
황제권은 옥타비아누스 이전에 로마를 통치했던 카이사르와 술라의 독재권과는 전혀 달랐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원로원과 시민들로부터 “독재권을 부여받았지만” 거절하였다.[2] 
법에 따르면 ‘존엄자’(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원로원은 평생 동안 권력을 가지도록 하였고 “호민관 권한”(tribunitia potestas)을 가졌으며 기원전 23년까지 집정관을 역임하였다.[3] 
아우구스투스는 재정적인 성공과 원정에서 얻은 물자, 제국 전체에 걸쳐 맺은 여러 피호 관계(clientela), 군인과 재향 군인의 충성, 원로원에서 부여한 여러 권한과 명예[4] 그리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 절대적인 권력을 누렸다. 
아우구스투스가 가진 로마의 정예병 로마 군단 다수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은 원로원에게 군사적인 위협이 되어 원로원의 결정을 억압하였고, 군사적 수단을 사용하여 원로원의 정적들을 제거하여 원로원이 자신에 복종하게끔 하였다. 
아우구스투스의 통치는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라 불리는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계속되는 변방에서의 전쟁과 황위를 둘러싼 1년의 내전(기원후 69년)에도 불구하고, 지중해 세계는 두 세기가 넘게 평화를 지속할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의 영토를 넓혔으며 제국의 국경과 동맹국을 보호하였고 파르티아와 평화 협정을 맺었다. 
그는 로마의 조세 체계를 개선하였고 파발을 위해 육로 교통망을 구축하였으며 상비군과 소수의 해군 그리고 황제의 친위대인 로마 근위대를 창설하였다. 
또한 로마에 경찰청과 소방청을 설치하였고 로마 시의 상당 부분을 재개발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죽기 전에 자신의 업적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것은 《아우구스투스 업적록》로 불리며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서기 14년 그가 죽은 직후, 원로원과 민회는 아우구스투스를 신으로 선포하였고 로마인들의 숭배를 받았다.[5] 
이후 모든 로마 황제들이 그의 황제명인 ‘아우구스투스’와 ‘카이사르’를 이름으로 썼다. 
또한 그를 기념하기 위해 기존의 "여덟 번째 달"(Sextilis)을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바꾸어 불렀다. 
그의 황위는 양자인 티베리우스가 물려받았다. 

FC 바르셀로나는 2015년 UEFA 슈퍼컵에서 세비야 FC를 상대로 5 – 4로 승리했다. 
메시는 이 경기에서 프리킥으로 2골을 넣었다. 
9월 25일, 시즌 초반에 훌륭한 플레이를 보이던 메시는 라스 팔마스와의 홈 경기에서 전반 10분 경 부상으로 교체되었다. 
이 부상으로 메시는 8주간 결장을 하게 된다. 
그러나 FC 바르셀로나는 메시가 부상으로 없는 동안 네이마르와 수아레스의 맹활약으로 라리가 단독 1위를 질주하였다. 
2015년 11월 21일, 메시는 엘 클라시코에서 후반 10분에 이반 라키티치와 교체되어 복귀전을 치렀다. 
이 경기에서 수아레스가 2골을 넣었고, 네이마르와 안드레스 이니에스타가 릴레이 골을 넣어 FC 바르셀로나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0 – 4로 레알 마드리드를 대파했다. 
11월 24일, FC 바르셀로나는 UEFA 챔피언스리그 조별예선 AS로마전에서 6 – 1로 대승을 거두었다. 
메시는 이 경기에서 2골 1도움을 기록하여 자신이 건재함을 알렸다. 
12월 20일, FC 바르셀로나는 일본 요코하마 국제 종합경기장에서 열린 FIFA 클럽 월드컵 결승전에서 아르헨티나의 리버 플레이트를 3 – 0으로 꺾었다. 
메시는 1골을 득점했으며 이 우승으로 FC 바르셀로나는 FIFA 클럽 월드컵 최다 우승팀이 되었다(3번 우승). 
한편 2016년 1월 11일, 리오넬 메시는 41.33%의 압도적인 득표율을 기록하며 2015년 FIFA 발롱도르를 수상하였다. 
이로써 메시는 이 상을 5번이나 수상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2] 
1월 6일, FC 바르셀로나는 코파 델 레이 16강전을 RCD 에스파뇰을 상대로 치렀고 1차전에서 메시는 에스파뇰 수비수들의 거친 플레이에도 불구하고 2골 2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대활약했다. 
FC 바르셀로나는 이 경기에서 4 – 1로 대승했다. 
이 경기 이후 에스파뇰은 비신사적인 플레이와 팬들의 비상식적인 행동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3] 
1월 9일, 메시는 라리가 19라운드에서 그라나다 CF를 상대로 3골을 넣어 시즌 첫 해트트릭을 달성했다(바르셀로나 4 – 0 승). 
20라운드 아틀레틱 빌바오전에서는 페널티킥을 성공시켰고(바르셀로나 6 – 0 승), 21라운드 말라가 CF 원정에서는 환상적인 시저스킥으로 결승골을 뽑아내 FC 바르셀로나의 1 – 2 승에 기여했다. 
1월 31일, 프리메라리가 22라운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전에서는 0 – 1으로 뒤진 상황에서 동점골을 넣었다. 
이 경기는 FC 바르셀로나가 메시와 수아레스의 골에 힘입어 2 – 1로 승리했으며 이로써 한 경기를 덜 치른 상황에서 2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승점차를 3점으로 벌렸다. 
2월 3일, 캄프 누에서 치뤄진 발렌시아 CF와의 코파 델 레이 준결승 1차전에서 FC 바르셀로나는 7 – 0으로 완승하여 코파 델 레이 결승 진출을 사실상 확정지었다. 
이 경기에서 메시는 해트트릭을 달성했으며 루이스 수아레스가 4골을 넣었다.
2월 10일, 바르셀로나는 코파 델 레이 준결승 2차전에서 발렌시아와 1 – 1로 비겨 29경기 연속 무패로 구단 내 최다 연속 무패 기록을 달성했다. 
이전까지는 과르디올라 때의 28경기 무패가 최고 기록이었다.[4][5] 
2월 17일, 스포르팅 히혼전에서 메시는 2골을 기록했는데 이는 메시의 프리메라리가 300호, 301호 골이다. 
이로써 메시는 라리가에서 334경기만에 300골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라리가 300골은 메시가 최초로 달성한 기록이며 메시의 301호 골은 FC 바르셀로나 통산 10000호 골이기도 하다. 
이 경기에서 FC 바르셀로나는 1 – 3으로 승리를 거두었다.[6] 
2월 23일,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에서 열린 아스날과의 UEFA 챔피언스리그 16강 1차전에서 메시는 후반에만 2골을 넣었고, 팀은 이에 힘입어 0 – 2로 승리했다. 
70분 동안 아스날의 전술이 어느 정도 통하면서 경기가 팽팽하게 진행되었으나, 후반 70분에 MSN이 빠르게 역습을 전개하여 골을 만들어냈고, 아스날은 이 한 골에 무너지고 말았다.
리오넬 메시는 이후의 라리가 경기에서 대활약했다. 
26라운드 세비야 FC와의 경기에서 팀이 0 – 1로 지고 있던 상황에서 환상적인 프리킥으로 득점해 팀의 2 – 1 역전승에 기여했고, 27라운드 라요 바예카노와의 경기에서는 시즌 3번째 해트트릭을 달성하며 팀의 1 – 5 대승을 도왔고, 28라운드 SD 에이바르전에서는 2골을 기록하며 라리가 2015-16 시즌 20호골 득점에 성공했으며(바르셀로나 0 – 4 승), 29라운드 헤타페전에서는 1골 3도움을 기록했다(바르셀로나 6 – 0 승). 
라리가 27~29라운드에서 메시는 득점과 도움 면에서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6골 3도움), 2015-16 시즌 중 최상의 경기력을 보였다. 
3월 16일, UEFA 챔피언스리그 16강 2차전에서 FC 바르셀로나는 MSN의 득점에 힘입어 아스날을 상대로 3 – 1로 승리하며 1,2차전 합계 5 – 1로 8강에 진출했다. 
이 경기까지 메시는 아스날을 상대로 6경기 9골을 기록했으며 FC 바르셀로나는 무패기록을 38경기까지 늘렸다.
한편 메시는 다음 경기인 라리가 30라운드 비야레알 CF전에서 득점하지 못했고, 경기는 2 – 2로 끝났다. 
이후의 2주간의 A매치 기간 동안 메시는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선수로 2경기에 출전했다. 
A매치 기간 이후, 메시는 라리가 31라운드 엘 클라시코(바르셀로나 1 – 2 패),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UEFA 챔피언스리그 1차전(바르셀로나 2 – 1 승), 라리가 32라운드 레알 소시에다드전(바르셀로나 1 – 0 패), UEFA 챔피언스리그 8강 2차전(바르셀로나 2 – 0 패)에서 득점하지 못했으며, 전체적으로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7] 
FC 바르셀로나도 메시가 득점하지 못한 5경기에서 1승 1무 3패로 부진했고 2015-16 UEFA 챔피언스리그의 강력한 우승후보였음에도 불구하고 8강에서 탈락의 쓴맛을 봤다. 
4월 17일, 라리가 33라운드 발렌시아 CF와의 경기에서 메시는 득점에 성공해 골 가뭄에서 벗어났지만 팀이 1 – 2로 패해 FC 바르셀로나의 라리가 선두 자리가 위태로워졌다. 
라리가 29라운드까지 1위 FC 바르셀로나와 2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승점차는 8점이었지만, 33라운드 이후에는 승점 동률이 되었다. 
FC 바르셀로나의 무패기록은 엘 클라시코 패에 의해 39경기에서 끝났다. 
한편 메시의 발렌시아전 득점은 그의 통산 500호 골이다.[8]
발렌시아전 이후부터 리오넬 메시의 경기력은 좋아졌고, FC 바르셀로나의 경기력도 부진 이전의 수준으로 돌아왔다. 
라리가 34라운드 데포르티보 라코루냐전, 35라운드 스포르팅 히혼전에서 FC 바르셀로나는 각각 0 – 8, 6 – 0 대승을 거두었다. 
36~38라운드 라리가 경기에서도 FC 바르셀로나는 모두 무실점 승리를 거두었다. 
리오넬 메시는 2015-16 시즌 프리메라리가에서 26골 16도움을 기록해 득점 3위, 도움 공동 1위(루이스 알베르토 수아레스와 함께)에 올랐다. 
FC 바르셀로나는 라리가 38라운드 그라나다 CF와의 경기에서 0 – 3으로 승리하여 29승 4무 5패 승점 91점으로 우승을 확정지었다. 
한편 5월 22일, 에스타디오 비센테 칼데론에서 펼쳐진 세비야 FC와의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 연장까지 가는 승부끝에 FC 바르셀로나가 2 – 0으로 승리했다. 
메시는 득점은 하지 못했지만 2도움을 달성해 팀의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로써 FC 바르셀로나는 클럽 역사상 7번째 더블을 달성했고 2015-16 시즌에 프리메라리가, 코파 델 레이, UEFA 슈퍼컵, FIFA 클럽 월드컵 4개의 대회에서 우승을 달성했다.

간토 대지진[13][14](일본어: 関東大地震) 또는 한국에서는 관동 대지진[15]은 1923년 9월 1일(다이쇼 12년) 11시 58분(일본 표준시)에 일본 도쿄도 등을 포함한 미나미칸토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해구형 지진이다.[16][17] 
지진의 진동은 본진이 시작될 때부터 완전히 멈출 때까지 4분에서 최대 10분까지 걸린 오래 지속된 지진이다.[3] 
이 지진으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 및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적인 간토 대학살 등을 통틀어 간토대진재(일본어: 関東大震災 かんとうだいしんさい[*])라고 부른다.[18] 
1703년(겐로쿠 16년)에 일어난 지진도 간토 대지진과 거의 비슷한 구조로 일어났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이 지진을 다이쇼 간토 지진(일본어: 大正関東地震)으로 부르고 1703년 간토 지진을 겐로쿠 간토 지진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19][20][21] 
이 두 지진은 사가미 해곡의 판 경계를 따라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22] 두 지진을 한데 묶어 사가미 해곡 거대지진으로 부르며[23] 간단하게 사가미 해곡에서 일어나는 지진을 총칭하여 간토지진으로 묶어 부르기도 한다.[24] 
1971년 가나모리 히로가 발표한 지진 매커니즘에 따르면 간토 대지진은 미우라반도 연장선 방향의 사가미 해곡의 주축에 평행한 우향 낮은 섭입 각도의 역단층으로 일어난 지진으로 추정된다.[6][26] 
1996년 다케무라 마사유키도 P파의 초동분포를 통해 진원 매커니즘을 분석하여 가나모리가 말한 대로 필리핀해판의 섭입 방향으로 추정되는 북동동 방향으로 34도 정도 경사진 경사면이 단층면으로 추정되며 옆으로 어긋난 성분이 많다고 추정하였으나 다른 가설들도 많아 이것이 확실한 것은 아니다.[27] 
일본 지진조사위원회에서는 필리핀해판이 침강하는 판 경계간 지역에서 북아메리카판이 끌려 내려가다 반대로 튕겨 올라가면서 일어난 지진으로 보고 있다.[28] 
반면 필리핀해판의 혼슈 쪽 판 사이 경계 지점은 지질학적으로 제니스 부근에 있으며, 지질학적 시간 척도에서 스루가 해곡에서 일어날 것으로 추정되는 도카이 지진을 볼 때 간토 대지진은 판 내부에서 일어난 지진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29] 
지각변동을 통한 추정으로는 진원단층이 쇼난 지역 내륙 안쪽까지 있다고 추정되며[19] 지진의 진동은 오다와라 지역이 제일 심했다.[18] 
도쿄도에서 진도6을 관측했으나 이 간토 대지진을 마지막으로 2000년 미야케섬 화산 분화로 인한 지진을 제외하고는 도쿄도에서 진도6 이상을 지진을 관측한 적이 없다.

모든 마야 언어는 마야조어라 불리는 조상 언어의 후손이다. 
마야조어는 과테말라 중부 추추마탄 산악 지대에서 쓰였을 것으로 생각되며, 이는 오늘날 칸호발어파 사용 지역과 대략 일치한다.[6] 
치아파스와 과테말라의 산악 지대를 마야어의 “요람”으로 처음 지목했던 사람은 독일의 골동품 전문가이자 학자인 카를 자퍼(Sapper 1912)이다.[참고 2] 
테렌스 코프먼과 존 저스티슨은 3천 개 이상의 마야조어 어휘를 재구한 바 있다.[7] 
현재 정설인 라일 캠벨과 테렌스 코프먼의 분류에 따르면, 기원전 2200년경 와스텍어파 화자들이 멕시코만 해안을 향해 북서쪽으로 이주하면서 최초의 분기가 발생했다.[8] 
그 뒤 유카텍조어 화자들과 촐조어 화자들도 본 집단에서 이탈하여 유카탄 반도를 향해 북쪽으로 이주했다. 
서부 분기군의 화자들은 오늘날 맘어파와 키체어파가 분포하는 지역을 향해 남쪽으로 이동했다. 
첼탈조어의 화자들은 촐어파 집단에서 떨어져 나와 남쪽의 치아파스 산악 지역으로 이주함에 따라 미헤소케어족 화자들과 접촉하게 되었다.[9] 
로버트슨과 휴스턴의 대안적 가설에 따르면, 와스텍어파는 촐어파 화자들과 함께 과테말라 산지에 머물렀으며 코프먼이 주장하는 것보다 훨씬 늦은 시점에 분기했다.[10] 
기원전 2000년 이전의 상고 시대에 마야조어는 미헤소케어족에서 몇몇 차용어를 받아들인 듯하다. 
초기 마야인이 미헤소케어족 화자, 어쩌면 올멕의 지배를 받았다는 가설이 여기서 나왔다.[참고 3] 
한편 싱카어족과 렝카어족의 경우에는 마야어족이 차용어를 받기보다는 준 사례가 더 많다. 
캠벨과 같은 마야어족 전문가들은 이 사실이 마야인과 렝카족·싱카족 간 활발한 접촉의 시기가 (어쩌면 250~900년경의 고전 시대에) 있었음을 시사한다고 본다.[4]다 
스페인이 중앙아메리카를 식민 지배하면서 모든 토착어는 새로이 위세 언어가 된 스페인어에 밀려 자리를 잃었다. 
행정, 종교, 문학 등 사회의 여러 주요 영역에서 마야어는 더 이상 쓰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마야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외부 영향에 대한 저항이 컸고,[참고 4] 어쩌면 그 이유 때문에 많은 마야 공동체에서는 지금까지도 마야어 단일언어화자의 비율이 높게 유지되고 있다. 
현재 마야 지역에서는 스페인어가 우세하다. 
몇몇 마야 언어는 사멸 위기이거나 사멸 직전이지만, 다른 언어들은 매우 건강하여 모든 연령대와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쓰이고 있다.[참고 5]

세일즈포스닷컴은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본사를 지어 더블린, 싱가포르, 도쿄의 여러 지역을 커버하는 지역 거점을 마련하고 있다. 
그 외에 토론토, 뉴욕, 런던, 시드니, 샌머테이오 등에 주요 지사가 있다. 
2008년 9월, 프레디맥(Freddie Mac)과 패니매이(Fannie Mae)가 빠지고, 패스티널(Fastenal)과 함께 S&P500를 구성하는 종목이 되었다.[1] 
세일즈포스닷컴 서비스는 16가지 언어로 이용 가능하고,[2] 2010년 10월 31일 기준으로 세계적으로 87,200개사에 도입되어 200만명 이상의 사용자가 있다.[3] 
지금까지 영업 지원(SFA), 고객 관리(CRM) 소프트웨어의 SaaS 벤더로서 실적을 쌓아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우체국 회사나 주식회사 패스트 리테일링을 시작으로, Force.com(PaaS)으로 커스텀 애플리케이션을 구축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서비스를 적용하는 업무의 폭이 확장되고 있다. 
또한, Force.com에 대응되는 언어의 추가(VMForce(자바), 헤로쿠(루비)), Database.com)가 발표되는 등, 플랫폼 기업을 목표로 하는 것과 동시에 서비스의 오픈화를 추진하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4] 
세일즈포스닷컴의 서비스는 모두 인터넷으로 제공되는 클라우드 컴퓨팅 모델이다. 
서비스는 SaaS형 애플리케이션인 Salesforce CRM과, PaaS형 Force.com 플랫폼으로 나눌 수 있다. 
클라우드 컴퓨팅 모델의 통합 CRM(고객 관계 관리) 응용 프로그램이다. 
SFA(영업 지원 시스템), 마케팅, 서비스&지원, 대리점 관리, 모바일, 아이디어스, 콘텐츠 관리 응용 프로그램과 함께, G 스위트나 구글 애드워즈와 제휴 응용 프로그램도 제공한다. 
기능 제약에 따라 5가지 판본(Edition)이 있다. 
포스닷컴은 클라우드 컴퓨팅 모델의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기 위한 플랫폼이다. 
인프라, 데이터베이스, 통합, 논리, 유저 인터페이스라고 하는, 클라우드 컴퓨팅 모델의 애플리케이션 개발에 필요한 요소를 갖추고 있다. 
세일즈포스 CRM도 포스닷컴 위에 구축된 애플리케이션으로, 포스닷컴의 여러 기능을 이용한 것이다. 
커스터마이즈나 다른 응용 프로그램과 통합하는 것도 가능하다. 
높은 수준의 응용 프로그램을 개발할 때에는 자바와 유사한 포스닷컴 에이팩스 코드(Force.com Apex Code)라고 하는 독자적인 프로그램 언어를 이용한다. 
사용자 인터페이스 개발에 이용되는 비주얼포스(Visualforce)는 자바서버 페이스(Java Server Faces)와 유사한 구문으로, HTML, Ajax, 아파치 플렉스에 대응된다. 
구글 앱 엔진, 아마존 웹서비스, 페이스북 등, 클라우드 컴퓨팅 모델로 제공되는 플랫폼과의 제휴도 지원한다. 
기능 제약에 따라 3가지 판본(Edition)이 있다. 
AppExchange는 SaaS형 애플리케이션 시장으로, 2005년에 발표되었다. 
외부 개발자 등에 의해서 개발된 유상 및 무상의 애플리케이션이 공개되고 있어 기존의 환경에 설치하여 이용할 수 있다. 
2008년 9월 기준으로, 450개 이상의 ISV등에 의해 800개 이상의 애플리케이션이 탑재되고 있으며 설치 실적은 65,000본 이상이다.

케플러는 1571년 12월 27일, 바일데어슈타트의 제국자유도시(현재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슈투트가르트에 속하고 슈튜트가르트 중심부에서 30 km 서쪽으로 떨어져 있는 동네)에서 칠삭둥이 미숙아로 태어났다. 
케플러 본인이 어른이 되고 나서 계산한 바에 따르면, 부모가 결혼한 다음날 오전 4시 47분에 자신이 잉태되었다고 한다. 
할아버지 제발트는 그곳 읍의 장이었지만 케플러가 태어날 즈음에는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아버지 하인리히는 보수가 불확실한 용병 일로 벌이를 했고, 케플러가 다섯 살 때 집을 나가버렸는데, 80년 전쟁 당시 네덜란드 전선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관집 딸이었던 어머니 카탈리나 굴덴만은 치료사이자 약재상이었는데, 이것 때문에 나중에 마녀로 몰리게 된다. 
이르게 태어난 케플러는 병약하지만 영리한 아이였고, 외할아버지의 여관에 묵는 사람들을 자신의 굉장한 수학적 재능으로 놀라게 하곤 했다[1]. 
케플러는 여섯 살 때 1577년 대혜성을 목격했으며, 후에 그 일을 《여섯 살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며》에서 "나는 1577년의 혜성에 대해 많이 들었고, 어머니께서는 그것을 보기 위해 나를 데리고 높은 장소로 올라가셨다"라고 회고했다[2]. 
10살 때, 그는 또다른 천문학 현상인 1580년 월식을 관찰하였고, 후에 월식을 보기 위해 “밖으로 불려가서” 달이 “약간 붉은 색이 된 것”을 보았다고 회고했다[3]. 
케플러는 어려서부터 천문학을 알게 되었고, 평생에 걸쳐 천문학에 사랑을 쏟았다. 
그러나 유년 시절에 천연두를 앓은 바람에 병약한 신체와 불구의 손을 가지게 되었고 시력도 악화되어 관측 능력에 결함이 생겼다[4][5]. 
케플러는 뷔르템베르크의 지방 귀족들이 레온베르크에 세운 영재학교에 들어갔다. 
케플러는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었지만, 부모에게 물려받은 고약한 성격 탓에 친구가 없었다. 
훗날 케플러의 자서전에서 이 시절을 묘사한 대목은 끝도 없이 “누군가와 싸웠다, 누군가가 자신을 미워했다”는 내용들로 가득차 있다. 
케플러는 어려서부터 잔병치레가 잦았고, 심기증 환자기도 했다.[6] 
1589년, 초등 학교, 라틴어 중등 학교, 뷔르템베르크의 국영 개신교 신학교를 거친 뒤, 케플러는 튀빙겐 대학교에 신학 학생으로 들어가 비투스 뮐러 밑에서 철학을 공부했다[7]. 
교과 과정 중에는 수학과 천문학도 있었다. 
그는 자신이 굉장한 실력의 수학도임을 증명했고 능숙한 점성술사라는 평판을 들었으며, 동년배 학생들에게 별점을 쳐주곤 했다. 
대학의 수학 교수였던 미하엘 매스틀린의 지도를 받으며, 케플러는 행성운동에 관하여 개신교에서 의무적으로 가르쳐야 하는 프톨레마이오스설과 일부 제자들에게만 개인적으로 가르쳤던 코페르니쿠스설 양쪽을 모두 배웠다[8]. 
그는 이 시점부터 코페르니쿠스주의자가 되었다. 
학생들 간에 토론이 벌어지면, 케플러는 이론적인 관점과 신학적인 관점 모두에서 지동설을 옹호했고, 태양이 우주를 움직이는 주요한 원천이라고 주장했다[9]. 
목사가 되겠다는 바람에도 불구하고, 학업의 막바지에 이르러 케플러는 오스트리아 그라츠의 개신교 학교(그라츠 대학의 전신)의 수학과 천문학 교사 자리로 천거되었다. 
그는 1594년 4월, 나이 23세 때 그 자리를 받아들였다[10]. 
하지만 케플러는 훌륭한 학자이긴 했어도 훌륭한 교육자는 되지 못했다. 
목소리는 웅얼거렸고, 빈번히 강의 주제를 벗어나 옆길로 빠졌으며, 그라츠에서의 두 번째 해에는 수강생이 한 명도 없었을 정도로 말 못하게 지루한 강의였다고 한다[11].

리히텐슈타인은 1719년에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공국으로 설립되었고 1866년에 완전한 독립을 얻었다.[2] 
이 시기에 파란색과 빨간색은 리히텐슈타인의 국기에 사용되었고 금색과 빨간색으로 구성된 기 또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색상들은 1764년에 요제프 벤첼 1세 공작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1] 
1921년 10월에 리히텐슈타인에서 새 헌법이 제정되었다.[1][3] 
이 헌법은 파란색과 빨간색으로 구성된 국기에 "공식적인 지위"를 부여했다.[1] 
그런데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1936년 베를린 하계 올림픽에서 아이티의 국기와 리히텐슈타인의 국기를 혼동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리히텐슈타인 정부는 공작의 지위를 의미하는 왕관 디자인을 국기에 추가하기로 결정했다.[1][4][5] 
이러한 변화는 리히텐슈타인의 공국 지위 표현, 아이티의 국기와의 구별이라는 2가지 목적을 수행했다.[4][6] 
수정된 디자인은 1937년 6월 24일에 채택되었는데[6] 현재의 국기 디자인은 1982년 6월 30일에 수정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10월 16일에 사우디아라비아와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3년 3월 31일에 개정된 《재외공관의 명칭·위치 및 관할 구역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제6619호)에 따라 사우디아라비아 지다에 대사관을 설립하기로 결정했다.[2][3] 
1984년 7월 28일에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자국 영내에 주재하는 모든 외국 대사관을 수도인 리야드로 이전할 것을 권고함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도 1984년 7월 19일에 열린 국무회의를 통해 지다에 위치한 주사우디아라비아 대한민국 대사관을 리야드로 이전하기로 결정했다.[4] 
또한 1984년 7월 28일에 개정된 《재외공관의 명칭·위치 및 관할 구역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제6619호)에 따라 주젯다 대한민국 총영사관이 1984년 9월에 정식 개관했다.[5][6]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6월 5일에 IMF 구제금융 체제의 여파로 인하여 주젯다 대한민국 총영사관을 폐쇄하기로 결정했다.[7] 
이에 따라 1998년 8월을 기해 주젯다 대한민국 총영사관이 폐쇄되었고 해당 공관에서 관할하던 업무가 주사우디아라비아 대한민국 대사관에 이관되었다.[8] 
그러다가 2007년 7월 19일에 개정된 《외교통상부와 그 소속 기관 직제》(대통령령 제20179호)에 따라 사우디아라비아 지다에 대한민국 총영사관을 다시 설립할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고[9] 2008년 1월에 주젯다 대한민국 총영사관이 재설립되었다.[6]

김연아(金姸兒[2][3], 영어: Yuna Kim, 1990년 9월 5일~)는 대한민국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였다. 
2010년 동계 올림픽 여자 싱글 부문 금메달리스트, 2014년 동계 올림픽 여자 싱글 부문 은메달리스트, 그리고 2009년 · 2013년 세계 선수권 챔피언이며, 대한민국 최초의 올림픽 메달리스트, 세계선수권대회 메달리스트이다. 
2003년, 2004년, 2005년, 2006년, 2013년, 2014년 한국 피겨스케이팅 종합 선수권 대회 우승자이기도 하다. (6회 우승) 
또한 2009년 4대륙 피겨 스케이팅 선수권 대회 우승, ISU 그랑프리 파이널 3회 우승을 통해 피겨 스케이팅의 여자 싱글 부문에서 4대 국제 대회(동계 올림픽, 세계 선수권, 4대륙 선수권, 그랑프리 파이널)의 그랜드 슬램을 사상 최초로 달성한 선수이기도 하다. 
2009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총점 207.71을 기록해 여자 싱글 부문에서 사상 최초로 200점을 돌파하였다. 
2010년 밴쿠버 동계 올림픽에서는 쇼트 프로그램 78.50점, 프리 스케이팅 150.06점, 총점 228.56으로 다시 세계 최고 기록을 경신하였다. 
2007년 세계선수권 쇼트 프로그램 이래로 여자 싱글 부문의 쇼트 · 프리 · 총점에서 모두 11번의 세계 최고 기록을 수립했으며, 이 중 8번이 자신의 기록을 자신이 경신했다. 
김연아가 보유하고 있었던 쇼트 기록은 2014년 세계 피겨 스케이팅 선수권 대회에서 일본의 아사다 마오에 의해서 경신될 때까지 세계 최고 기록이었으며, 프리 · 총점 기록은 2017년 유럽 피겨 스케이팅 선수권 대회에서 러시아의 예브게니야 메드베데바에 의해서 경신될 때까지 세계 최고 기록이었다. 
2011년 세계 선수권 이후에는 2018년 동계 올림픽의 대한민국 평창군 유치 홍보 대사로 활동하여, 2011년 7월 7일(대한민국 시간 기준) 남아프리카 공화국 더반에서 결정된 2018년 동계 올림픽의 대한민국 평창군 유치에[4] 크게 기여하였으며, 자크 로게 IOC 위원장이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준비한 대회인 2012년 제1회 동계 유스 올림픽의 홍보대사로 임명되었고, 2012년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동계 올림픽 유치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5] 
2016년에는 제2회 동계 유스 올림픽 홍보대사로 위촉되어 활동하였다. 
또한, 2014년 동계 올림픽까지 출전한 모든 대회에서 3위 내에 입상하여 피겨 스케이팅 여자 싱글 부문에서 최초로 올포디움(All Podium)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6] 
종교는 천주교이며, 세례명은 '스텔라(Stella)'이다.

생성적 사전학습 변환기 3(영어: 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 3), GPT-3는 OpenAI에서 만든 딥러닝을 이용한 대형 언어 모델이다. 
비지도 학습과 생성적 사전학습(generative pre-training)기법, 변환기(언어 오류(entransformer): {{{2}}})를 적용해 만들어 졌다. 
번역과 대화, 작문을 할 수 있으며, GPT-2에 비해 훨씬 인간이 쓴 글인지 기계가 쓴 글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졌다.

백열등은 유리구 속에 텅스텐 필라멘트를 봉입하고 내부를 진공으로 만들거나 또는 불활성 가스인 질소나 아르곤 등을 넣은 것이다. 
금속 부분은 전류를 통하는 역할뿐만 아니라 전구를 소켓에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필라멘트는 20W 이하의 것에는 단(單)코일, 그 이상의 것에는 2중 코일의 필라멘트로 되어 있다. 
2중 코일로 하면 봉입 가스의 대류로 인한 열손실을 감소시킬 수가 있어 효율을 높일 수가 있다. 
또 가스를 봉입하는 것은 텅스텐이 고온으로 증발되어 유리구의 내면에 부착되어 까맣게 되는 흑화현상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유리구의 내면을 잿빛유리로 만든 것은 눈부신 것을 막는다.[1] 
청색 유리를 사용한 주광색(晝光色)전구, 내열성 색소를 칠한 색전구(色電球), 순백색의 산광성도료(散光性塗料)를 칠한 전광전구(全光電球), 유리구의 모양을 반사갓형으로 하고 그 내면을 도금한 리플렉터 램프 등이 있다. 
회중 전등용의 꼬마전구도 전압이 낮을 뿐 구조는 마찬가지이다. 
꼬마전구를 잘 이용한 것은 플래시 라이트(회중전등)이며 그 전원으로서는 주로 건전지와 축전지가 사용된다. 
전구는 최초의 밝기의 80%가 되기까지의 시간을 수명이라 하는데 현재의 규격으로는 1000 ∼ 1200시간이다. 
전구는 함께 사용하는 기구(셰이드나 글로브)의 선택이 중요하며 또 먼지가 묻어 조명 효과를 손실하는 일이 없도록 손질을 해 주는 것도 중요하다. 
일반주택의 경우는 제곱미터당 약 10W 정도가 적당하다.[1] 
빛 뿐만 아니라 열도 내기 때문에 작동 중에 만지면 화상의 위험이 있으며, 작동 중에 물이 닿으면 파손되어 유리 파편이 날아오는 위험도 있다. 
꺼져도 열이 일정기간 남아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아돌프 히틀러(독일어: Adolf Hitler, 1889년 4월 20일 ~ 1945년 4월 30일)는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지도자이자 나치 독일의 초대 퓌러다. 
뛰어난 웅변술과 감각의 소유자였던 히틀러는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으로 인하여 독일이 서약한 베르사유 체제, 대공황 이후 정권을 잡았다. 
히틀러는 군대를 대량 모집하여 취업률을 올렸고, 전쟁 자금이나 국가 민족의 희생양으로 유대인을 지목하여 독일의 게르만족의 지지를 얻었다. 
이후 독일 민족 생존권 수립 정책을 주장하며 자를란트의 영유권 회복과 오스트리아 병합,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폴란드 침공 등을 일으키며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히틀러 이전부터 유럽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증오가 뿌리 깊어 제1차, 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대부분의 유럽인들이 유대인들을 혐오하였고, 이는 유대인 혐오 정책이 호응을 얻은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였다.[5] 
전쟁 중 그의 유대인 말살 정책으로 인해 수많은 유대인들과 집시, 흑인, 중국인 노동자 그리고 슬라브인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같은 나치 강제 수용소의 가스실에서 학살당했다. 
또한 히틀러는 유대인 족보라는 걸 만들어 할아버지가 유대인이어도 증손자를 잡아가는 정책을 펼쳤고, 재산을 몰수했으며, 막노동이나 생체 실험을 하고 병들면 총살했다. 
그리하여 독일에서 도망친 유대인들은 재산피해, 인명피해가 컸다. 
나치 독일에 의해 학살된 사람들 가운데에는 동성애자와 장애인도 있었다. 
그 이유는 동성애자 등 사회적 약자가 독일 민족의 우수성에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세를 확장하던 독일은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깨고 전쟁을 선포하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패배하였고, 잇따라 참전한 미국에 인해 궁지에 몰린 히틀러는 1945년 4월 29일 소련군에게 포위된 베를린에서 에바 브라운과 결혼한 뒤 이튿날 베를린의 국가수상부 지하 벙커에서 청산가리 캡슐을 삼키고 발터 PPK으로 자신을 쏘아 자살했다.[6] 
그러나 독약 캡슐을 쓰지 않고 권총만을 이용해 자살했다는 서술도 있다.[7] 
그의 어머니인 클라라와 결혼하기 전 이미 부친 알로이스 히틀러에게는 장남 알로이스 2세와 딸 앙겔라를 두고 있었고 결혼 후 아돌프를 갖기 전 낳은 클라라의 아들 두 명과 딸 한 명은 모두 일찍 죽었다. 
양봉일에 열중해있던 아버지와 아돌프의 관계는 소원했던 반면 이미 자신의 친자식을 셋이나 잃은 클라라는 아돌프마저 일찍 죽게 될까 두려웠고 그를 애지중지하며 키워 아돌프는 클라라의 응석받이가 되었다. 
이어 1893년 남동생 에드문트가 태어났고, 1896년 여동생 파울라가 태어났으나 에드문트는 일찍 죽게 되고 결국 아돌프와 파울라만이 클라라의 친자식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또한 아돌프가 7세 되던 해 당시 14세였던 그의 형 알로이스 2세는 아버지 알로이스와의 마찰로 가출하게 된다. 
또한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 출신이라는 설이 한때 돌기도 했지만, 그는 오스트리아 출신이다. 

라면(拉麵, 문화어: 꼬부랑 국수, 영어: instant noodles, instant ramyun/ramen)은 국수를 스프, 건더기 등을 함께 끓는 물에 넣어서 요리하는 국수 형태의 인스턴트 식품이다.[1] 
라면은 밀가루와 달걀 그리고 물과 소량의 소금 등을 넣어 반죽하여 면을 뽑고 한 번 삶고 튀겨서 녹말이 알파화한 면이 이후 뜨거운 물에 다시 먹을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지는 형태이다. 
면과 함께 분말스프와 건더기스프로 구성된 제품이 일반적이다. 
라면은 중국에서 전투시 비상 식량으로 사용된 것이 유래이다. 
당시 일본이 중일전쟁을 하면서 배워 왔다는 설도 있다. 
현재의 인스턴트 라면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극심한 식량 기근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에서 대만계 일본인인 안도 모모후쿠가 발명하였다. 
당시 미군 구호품으로 밀가루가 많이 있었기에 이를 이용한 새로운 식품을 고안하게 되었다. 
밀가루로 국수를 만들어 기름에 튀겨 국수 안의 수분이 증발되고 이후 뜨거운 물에 들어가게 되면 본래의 상태로 풀어져 먹기 좋은 상태가 된다. 
최초의 즉석 라면은 1958년 8월 25일에 현재 닛신식품의 전신인 산시쇼쿠산에서 생산한 치킨라면이었다. 
초기 라면은 양념이 면에 더해진 형태였으나 이후 1962년에 스프를 분말로 만들고 따로 첨부한 형태의 봉지면이 인기를 끌게 되었다. 
라면이 한국에 처음 도입된 것은 1963년 9월 15일이다.[2] 
1963년 9월 15일에 삼양식품 창립자 전중윤 회장은 일본의 묘조 식품으로부터 무상 기술원조를 받아 처음으로 삼양라면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또한 당시 라면의 가격은 10원이었다. 
처음에는 생소하여 판매가 부진했지만, 무료 시식회에서 그 맛을 인정받으며 곧 서민들의 음식으로 환영받게 되었다.[3] 
당시 정부의 혼분식 장려정책도 라면이 널리 보급되는 데 기여했다. 
1960년대 정부는 쌀 부족문제 해결을 위해 혼식(잡곡밥)과 분식(밀가루 음식)을 강제하는 정책을 실시했는데, 그 정책 덕분에 라면은 많이 팔릴 수밖에 없었다. 
그 실제 사례로 1969년에 한 해 동안 천 오백만 봉지가 팔렸다. 
1970년에 들어서는 즉석 짜장면, 칼국수, 냉면 등의 다양한 제품이 나왔다. 
또 한식에 맞고 대한민국의 문화에 알맞게 만든 된장라면이 출시되었다. 
1982년 11월 17일 육개장사발면의 출시를 시작으로 용기에 직접 뜨거운 물을 부어 먹는 컵라면이 인기를 끌기 시작하였다. 
이후 짬뽕라면, 비빔라면, 라볶이, 쌀라면 등 다양한 종류의 라면이 출시되고 있다. 
2018년부터 라면 포장지 외부면에 매운맛의 정도가 단계별로 표시되는 제도가 시행되었다.[4] 
인스턴트 라면의 분말 스프 (액상스프)를 시험해 매운 성분 (mg/kg, ppm)의 함량이 80 미만인 경우 '1단계(순한맛)', 80∼179일 경우 '2단계(보통 매운맛)', 180∼279일 경우 '3단계(매운맛)', 280 이상일 경우 '4단계(매우 매운맛)'로 구분해 라면 봉지의 주표시면 및 일괄표시면에 표시되어 있다.[4] 
한국 라면은 대부분 매운 맛을 사실상 표준으로 삼고 있다. 
국민 라면인 신라면 또한 매울 '신' 한자를 쓰고 있으며, 한국 라면은 매운 맛의 대명사며, 많은 유튜버 채널들도 매운 맛을 도전하기 위해 한국의 브랜드 라면들을 사용한다. 
매운 맛이 한국 라면의 표준이 된 사연은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 국민의 입맛에 맞게 라면을 맵게 할 순 없나'며 직접 삼양에 전화도 한 일화도 있다.[5]

전기 기타(電氣 guitar, electric guitar)는 현의 진동을 픽업에서 전기 신호로 바꾸어 앰프(amplifier) 소리를 내는 기타이다. 
보통은 일렉 기타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한편 전자 기타라고 표현하는 경우도 종종 보이는데, 이는 틀린 용어다. 
앰프를 연결하지 않아도 소리가 나기는 하지만, 울림통이 있는 다른 기타에 비해 음량이 매우 작다. 
가변저항의 일종인 볼륨 노브(volume knob)로 음량을 조절할 수 있으며, 이펙터(effector)를 이용하여 다양한 소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주로 피크를 이용하여 연주하며 간혹 손가락이나 다른 도구로 연주하기도 한다. 
전기 신호를 이용하기 때문에 다른 기타와 구별되는 독특한 주법이나 연주 형태가 많다. 
Rickenbacker(리켄베커) 기타의 탄생이 전기 기타의 최초라고 정의한다. 
전기 기타의 최초를 규정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픽업의 사용이다. 
1931년 Adolph Rickenbaker (아돌프 리켄베커 1886~1976)와 George D. Beauchamp (조지 뷰캠프)가 'Rickenbacker Internatinal Corporation'이라는 회사를 설립한다. 
회사설립과 함께 세계 최초의 전기 기타 'Frying Pan'(우측사진)이 등장하면서 전기 기타 악기의 신역사를 열게 된다. 
이후, Fender에서 싱글코일 픽업을 개발하면서 1950년에 Telecaster를 발매한다. 
이 기타를 전기기타의 대중화 시대를 열은 처음 기타로 보고 있는데, 1950년에 발매되어 현재까지 생산되고 있으며, 최초로 대량 생산된 제품이라 이전에 겨우 수십대, 수백대 생산된 제품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일렉기타의 대중화에 성공한 첫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Gibson은 당시 Epiphone에 의뢰하여 전기 기타를 개발하고 있던 유명 기타리스트 Les Paul 씨의 디자인을 라이센싱하여 Les Paul 기타를 1952년에 발매한다. 
이 기타는 Gibson에서 개발한 P90 픽업을 사용했다. 
Fender는 다시 1954년에 Stratocaster를 발매하면서 일약 세계 전기 기타 음악의 시대를 열게 된다.

키프로스 공화국(그리스어: Κυπριακή Δημοκρατία 키프리아키 디모크라티아[*], 튀르키예어: Kıbrıs Cumhuriyeti 크브르스 줌후리예티[*], 영어: Republic of Cyprus 리퍼블릭 오브 사이프러스[*]), 줄여서 키프로스(그리스어: Κύπρος 키프로스[*], 튀르키예어: Kıbrıs 크브르스[*]) 또는 사이프러스(영어: Cyprus)는 지중해 동부에 있는 섬나라로, 북쪽으로는 튀르키예, 동쪽으로는 시리아·레바논·이스라엘, 서쪽으로는 그리스, 남쪽으로는 이집트와 접한다. 
키프로스는 지중해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이며, 해마다 240만여 명의 관광객이 찾는 인기 관광지이기도 하다.[6]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1960년에 독립하여[7] 1961년 영연방에 가입하였다. 
키프로스 공화국은 이 지역에서 매우 선진적인 경제 수준을 보이며,[8] 2004년 5월 1일 유럽 연합에 가입하였다. 
1974년, 그리스 군사 정권의 지원을 받은[9][10] 에노시스 운동파[11][9][12]가 키프로스섬을 그리스에 병합하고자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에 터키는 키프로스를 침공하여 섬의 약 36%를 점령하였다. 
터키는 키프로스에 군사 개입을 하면서 미국[13][14]과 북대서양 조약기구[13]의 비밀 지원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수 천 명의 난민이 발생하였으며, 키프로스섬 북부에 북키프로스 정부가 수립되어 남북이 분단되었다. 

아폴론(그리스어: Απόλλων)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태양과 예언 및 광명·의술·궁술·음악·시를 주관하는 신이다. 
로마 신화의 아폴로(라틴어: Apollo)와 동일시된다. 
제우스와 레토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며 아르테미스와는 쌍둥이 남동생간이다. 
올림포스의 12신의 두 번째 세대에 속한다. 
월계수와 리라, 활과 화살, 백조, 돌고래가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아폴론은 대개 머리에 월계관을 쓰고 손에는 리라를 든[1] 훤칠하고 준수한 미남으로 묘사되며, 여성 및 남성과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가 많다. 
또한 헤르메스가 선물로 준 리라를 잘 연주하고 활도 잘 쏠 줄 알았다. 
종종 밝게 빛나는 자라는 뜻을 지닌 '포이보스'라는 별칭으로 불린다.[2] 
델포이 섬에 있는 아폴론 신전은 앞일을 예언하는 신탁으로 유명하다.[3] 
아폴론이 아직 태어나기 이전에 레토는, 자신이 임신한 쌍둥이들이, 아버지인 제우스 다음가는 권력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거짓말이다.
출산이 임박하자, 헤라는 레토가 아이를 낳는 곳을 저주하겠다고 했고 레토는 곤경에 처했다. 
헤라의 저주를 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어느 곳도 레토를 받아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토는 해산할 장소를 찾아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오르티기아 섬에 당도하였다. 
레토가 발을 디디자마자, 포세이돈이 섬 위로 파도를 솟구치게 하여, 햇빛을 막았다. 
아르테미스를 낳은 레토는 다시 이웃의 델로스 섬으로 가서, 아흐레 동안 진통을 겪으며, 남은 아이를 낳으려고 애썼다. 
그러자 헤라는 분만의 여신 에일레이티아를 붙잡아두면서, 해산을 방해했다. 
이에 보다 못한 제우스는 무지개의 여신 이리스에게 말 에일리이티아는 이리스와 함께 비둘기로 변신해, 델로스로 날아가 레토의 해산을 도왔다. 
그 덕분에 레토는 무사히 해산하였는데, 그 아이가 바로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이다. 
아폴론이 태어난 지 나흘이 지나자, 제우스는 그에게 황금 왕관과 현악기 리라, 백조가 끄는 마차를 주며, 델포이로 가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곳에서 아폴론은 헤라의 명령으로 어머니 레토가 임신한 동안, 줄곧 괴롭혔던 큰 뱀 피톤을 화살을 쏘아 퇴치했다. 
이후 아폴론은 피톤이 지키던 가이아의 신전을 차지하고, 피티아를 통해 사람들에게 신탁을 내리고는 하였다. 
그 결과 인간은 가이아의 뜻이 아닌, 제우스의 뜻을 알리는 아폴론의 신탁에 의하여 미래에 대해 알 수 있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어떤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는, 델포이에 참배하고 아폴론의 신탁을 받았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피티아는 무아지경에 빠진 채로 중얼거리면, 사제들이 피티아의 신성한 말을 운문으로 옮겼다고 한다. 
델포이 신탁은 오이디푸스의 끔찍한 운명을 예언했으며, 소크라테스를 지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로 선언했다. 
그러나 시적인 표현 때문에 신탁이 애매모호한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신탁을 잘못 해석하거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듣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서는 ‘너 자신을 알라’, ‘그대의 정신을 억제하라’는 등의 유명한 금언들이 새겨져 있다. 

도쿄 구울(일본어: 東京喰種 도쿄구루[*])은 이시다 스이가 주간 영 점프에서 연재하였던 만화이자, 스튜디오 피에로에서 제작한 TV 애니메이션이다. 
만화가 이시다 스이의 데뷔작으로써, 슈에이샤의 《주간 영 점프》에서 2011년 41호부터 연재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49호에서 일시 휴재가 있었으나, 2012년에 재개되었으며, 2014년 49호까지 연재되었다. 
2011년 41호부터 49호까지를 수록한 단행본 제1권이 2012년 2월 22일에 발행된 2014년 8월 20일 현재 13권까지 발매되고 있다. 
인육을 주식으로 하는 구울이 존재한다는 세계관을 가지며, 각 에피소드의 제목은 두 자로 된 한자로 통일되어 있다.[2] 
2013년 8월부터 9월까지 점프 LIVE에서 번외편 《도쿄 구울 [JACK]》이 연재되었다. 
2014년 9월 18일 도쿄구울 만화책이 완결이 나나 싶었는데, 후에 만화책으로 '도쿄구울'이라는 타이틀은 버리고 이야기가 어느 정도 이어져 있으면서 새로운 시리즈를 연재 할 것 이라고 한다. 
어떻게 해서 원작 1부인 '도쿄구울'의 이야기를 새롭게 전개해 나갈지 주목된다. 
2014년 3월 20일에 마베라스 AQL의 공식 사이트에서 TV 애니메이션의 티저 사이트가 공개되었으며, 같은 해 6월부터 방영을 시작한 애니메이션 《도쿄 구울》은 《아흔아홉》으로 2014년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한 모리타 슈헤이 감독이 지휘를 맡았다. 
도쿄에는 "구울"이라는 오직 인육을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생명체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인간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며, 인간을 먹을 때나 자신들의 무기인 카구네를 꺼낼 때 두 눈이 척안으로 변하는 존재들이다. 
어느 날, 독서를 좋아하는 평범한 대학생 카네키 켄은 안테이크라는 카페에서 카미시로 리제라는 소녀를 만난다. 
나이나 혈액형, 독서를 좋아하는 것도 같았던 두 사람은 급속도로 친해지지만… 그녀는 구울! 
비록 리제가 철골에 깔려 죽긴 했지만 결국 인적이 드문 곳에서 리제에게 습격당해 빈사 상태에 빠진 카네키. 
리제의 장기를 이식해서 반구울(척안의 구울)이 됨으로 목숨을 건진다.

《메이플스토리》(영어: MapleStory, 일본어: メイプルストーリ-)는 위젯 스튜디오에서 제작하고 넥슨 코리아가 서비스하는 세계 최초의 2D 사이드 스크롤 방식 온라인 게임이다. 
전 세계 9개국 이상에서 서비스되고 있으며, 약 13억 명 이상의 사용자가 가입되어 있다. 
만화책 코믹 메이플스토리는 이 작품의 설정을 기반으로 하여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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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불꽃, 랜덤 큐브 등 확률형 아이템에서 얻을 수 있는 옵션들의 확률이 똑같지 않았던 것이었다. 
큐브의 경우 보보보{(보스몬스터 공격시 데미지 +n%)×3}[1], 방방방{(방어율 무시×3)}이 절대 안 뜨는 것으로 밝혀졌다.[2] 
또한 유저들에게 상대적으로 좋은 옵션이라고 평가받는 올스탯 옵션 등이 상대적으로 좋지 않다고 평가받는 점프력 옵션 등보다 발생할 확률이 적다는 것도 밝혀져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메이플스토리 모바일 게임은 대한민국에서 2004년 4월 서비스를 시작한 이후, 현재까지 누적 다운로드 수 1,000만 회 이상을 기록하였으며, 2007년 12월 일본의 이동통신사 NTT 도코모를 통해 모바일 메이플스토리 4종 서비스를 시작했다.[7] 
다음은 메이플스토리 모바일 게임을 출시 순서로 나열한 표이다.
